성경 안의 마리아
최경선
박사
들어가는 말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교의 내용을 알려면 성경과 성전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마리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성경의 초점이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느님(구약성경)과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신약성경)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많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서 아주 핵심적인 몇 가지 내용들을 찾아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마리아의 신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구약 안에서 간절히 기대되고 있었던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마주할 때, 메시아의 어머니가 함께 예언되고
있는 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성모 마리아에 관한 성서적 이해를
구약성경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신약성경 안에서도 성모 마리아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뒷전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가운데 비중 있게 진술되고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기록들이지만, 성모 마리아의 중요한
역할들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I. 구약성경
구약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암시를 주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에 대해 교회헌장(LG) 55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이 서술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의 내림이
천천히 준비되고 있다. 이 초기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낭독되고 보다 상세하고
완전한 계시의 빛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그 문서들은 구세주의 모친인 한 여인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 빛 속에서 본다면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 중에서 특별히 창세기
3장15절(원복음),
이사야서 7장14절(임마누엘
예언), 미카서 5장 1절-3절(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아 탄생), 그리고 ‘시온의 딸’에 관한 예언들과 상징들을 통해 성모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1. 창세기 3장 15절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이 성경 구절을 두고 원복음(原福音)
또는 원시복음(原詩福音)이라고도
한다. 원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구원을 언급하는 ‘최초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악이 선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기쁜 소식이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친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기도 하다. 이 원복음에는 종말론적
전투가 암시되고 있다. 뱀으로 상징되는 악마와 ‘여자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메시아적 인물과의 대결이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개별적인 단일 인물을
가리키기보다는 집합적인 의미로서 그 이후의 많은 후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즉 그
‘후손’은 아담과 하와 이후, 악의 세력과 투쟁하여 승리를 거둔 많은 성조(聖祖),
성인(聖人)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의 흐름은 악의 힘을 대표하는 단일 존재,
사탄과 대결하여 그를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특정한 단일 인물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특정한 개별 인물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 예를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이 세상의 지배자’와 맞서는 하나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이 투쟁이 갈바리아 산상에서 예수님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묵시록도 사탄을 옛 뱀으로 간주하고,
그 뱀을 그리스도에 의해 무찔러진 악마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자가 떨어졌습니다. 그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떨어졌습니다.”(묵시
12,9)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이라는 구절에서 이 ‘여자’는 누구인가?
본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 ‘여자’는 하와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와 이외의 다른 여인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서 구절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신탁(神託, divine oracle)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시는 이 신탁에서 ‘여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와만이 아니라, 그녀의 후손인 어느 여인을 지시할 수 있다.
그리고 ‘뱀의 후손’은 악마요,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투쟁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짓밟음을 뜻한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에서 ‘여자’라는 단어는 악마를 의미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어머니인 여인이다.
악마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어머니로서 이 여인은 내용상으로 하와와 거리가 멀다.
악마를 쳐 이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면,
이 여인이 예수의 어머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 전승은 이 여인을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고 마리아를 ‘제2의 하와’ 또는 ‘새 하와’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마리아가 첫 번째 하와의 범죄로 손상된 것을 복구하였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이
마리아에게 즐겨 적용하였던 표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 또는 ‘새 아담’이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다. 예컨대,
로마 5,12-21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대조하면서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바오로의 해석을 적용하여, 하와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불순종케 하고 범죄 하게 했다면, ‘제2의
하와’인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께 순종케 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데 협력한 셈이다.
성경의 첫째 권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원복음이 신비롭게도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에도 언급되고 있다.
첫째 권과 마지막 권의 훌륭한 조화가 우연만은 아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는 이 원복음이 실현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2. 이사 7,14: 임마누엘의 어머니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oth)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
(Álmah)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Ìmmanuél)이라
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구절은 ‘임마누엘 예언’이라고도 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다윗 왕조가 멸망할 위험에 놓였을 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유다의 왕 아하즈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하느님의 징표를 구하라고 권고한다.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아하즈는 이
권고를 묵살한다. 자신의 정책과 정치노선을 고집한다.
여기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그 징표를 손수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을 두고 신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벌였다.
쟁점은 두 가지다. 히브리어 ‘알마’(Álmah')라는
단어의 의미와 ‘징표’(oth)라는 단어의 의미다.
우선 ‘알마’라는 단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반드시 ‘처녀’를 일컫는 용어는 아니다.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는 ‘베툴라’(Bertulah')가
있다.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인’을 가리킨다.
젊은 여인은 반드시 처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녀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이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인은,
이미 결혼한 여인일 수도 있고 처녀일 수도 있다. 이
단어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처녀를 지시하는 단어 ‘베툴라’와 같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창세 24,16.43; 탈출
2,8; 시편 68,25 등이다.
결국 ‘알마’는 상당히 넓은 의미로 쓰인 포괄적인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단어가 이사야 7,14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의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우선 이사 7,14의 ‘알마’는 반드시 ‘처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교회 전승은 이 ‘알마’(Álmah')라는
단어를 분명히 ‘처녀’로 보고 있다.
70인역 희랍어 번역본도 이 ‘알마’를 ‘처녀’(parthenosfh)로
번역하고 있으며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도 ‘처녀’(virgo)로 번역하고 있다.
마태오도 자신의 복음에 그대로 인용하면서 ‘처녀’(parthenos)로
번역하고 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마태오는 이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마태
1,18-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태
1,18-25)
루카 역시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면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전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 자체만으로는 어렴풋했던 하느님의 계시가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시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26-37)
두 번째 쟁점인 ‘징조’(oth),
또는 ‘징표’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이 예언은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닌 특별한 사건이라는 어조를 지니고 있다. ‘징표’(기적)로
제시될 수 있어야 하는 사건이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이것을 메시아적 징표로 이해한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평범한 다른 출생과 구별되며,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에 더 비중을
싣는 것이다.
‘알마’(Álmah',
젊은 여인)는 임마누엘의 어머니로서 구원의 중재자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히즈키야의 어머니는 그 ‘알마’의 예형(豫型)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히즈키야 왕으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동정 잉태의 신비 안에서 완전하게,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다.
그 임마누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만큼 그 ‘알마’는 성모 마리아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사야의 징표는 단지 그 여인이 아이를 낳는 역할 만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구원 역사에 함께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아울러 지시하고 있다.
3. 미카 5,1-3: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아 출생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미카(기원전
738-700년경)는 예언자 이사야보다는 약간 늦지만
거의 동시대에 예언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의 예언은 신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며(마태
2,5-6; 요한 7,42)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인용하셨다(마태 10,35-36).
미카서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탄생이 다윗 가문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나탄의 예언(사무
하 7,1-15)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메시아의 출생지와 더불어 그의 모친을 가리키고 있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표현에서 ‘여인’은 이사 7,14의
‘알마’를 암시한다. 즉, 저 유명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의 메아리이다. 이 예언에서도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해방,
새로운 왕권, 혹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아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상(理想)은
창세 3,15 즉 원복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카서가 예언하는 메시아적 인물은 원복음이 암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의 세력과 투쟁한다(미카
2,12). 그 악의 세력은 이스라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적이기도 하다(미카
5,8; 5,11).
4. 미카서 4,1-14; 스바니야서
3,14; 즈카르야서 9,9; 요엘서
2,21-27: ‘시온의 딸’과 새로운 백성의 탄생
마지막 때에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주님의 산으로.......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이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들을 다스리리라........
(미카 4,1-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스바
3,14)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즈카
9,9)
.......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23).......
(요엘 2,21-27)
‘시온’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다.
특히 잘 방어할 수 있도록 높이 솟은 지역이었다(2사무
6,12). 다윗은 그곳에 ‘계약의 궤’를 모셨고(사무
하 6,12), 솔로몬은 그 북쪽에 하느님 성전을 짓고 ‘계약의 궤’를 모셨다(열왕
상 6장). 명실 공히 ‘시온 산’은
하느님의 ‘좌’가 되었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는 시온이 예루살렘과 동의어로 쓰였다.
스바니야서는 이 용어로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스바
3,12-13). 흩어졌던 그들이 하느님의 승리로 다시 모이게 된다(스바
3,20). 이제 ‘시온의 딸’은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는 이름이 되고 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김없는 약속이다. 여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희망이 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연결된 ‘시온의 딸’은 고통스러운 출산을 겪기는 하지만 출산 후
맞이하게 될 커다란 기쁨에 초대되고 있다(즈카 9,9;
요엘 2,21-27). 왜냐하면 이들은 곧 승리와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온의 딸’은 희망의 상징이 되고 있다.
‘시온의 딸’은 메시아 왕권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주 하느님의 공동 협력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시온의 딸’의 후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이사
49,20: 54,1-3; 66,7-8).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자주 간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체가 여성으로서, 동정녀로서,
애인으로서,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
묘사된다.
교회 전승은 처녀이면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이러한 ‘시온의 딸’과 관련된 예언들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기쁨의 메시아 출산, 그리고 갈바리아
산상에서 메시아 백성의 고통스러운 출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
자신의 설명을 통하여 갈바리아 산상의 십자가를 하나의 출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이런 의미에서 교부들만이 아니라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도 마리아를 시온의 딸과 연관시키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시온’ 또는 ‘시온의 딸’의 성서적 상(像)을
총괄하여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성모 마리아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온의 딸’이요
그 실현이다. 그리고 ‘시온의 딸’은 성모 마리아의 예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마리아의 예들과 상징들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성경의 자료들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교회가 마리아에게 적용하는 상징적 모델들은 많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성모 호칭기도」에서도
발견된다.
1) 그리스도교 전례에 적용된 모델들
a. 불타는 떨기나무(탈출 3,2)
모세가 본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덜기처럼 당신의 동정성은 온전하십니다.
천주의 모친이여.......(천주의 모친 대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제3후렴)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그 떨기나무는 타고 있으면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두고,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지만 그 동정성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상징이다.
b. 기드온의 양털 뭉치(판관
6,37-38)
주님 당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양털의 물기처럼 동정녀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나시면서 성서에 기록한 것을
성취하셨습니다.......(천주의
모친 대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제2후렴)
기적적으로 하늘로부터 이슬을 흠뻑 적신 기드온의 양털 뭉치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가득히 받아 하느님의
아들을 얻게 됨을 상징한다.
c. 계약 궤(탈출 25,8-16)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여라.......
그들이 아카시아 나무로 궤를 만들게 하여라.......
그리고 나서 내가 너에게 줄 증언판을 그 궤 안에 넣어라(탈출
25,8-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십계명판을 보관하고 다니던 ‘계약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였다.
교회 전승은 성모 마리아야말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현존하셨던 궁전으로 이해한다.
특히 ‘계약 궤’를 모시고 유다 고을을 향하여 기뻐 춤추는 다윗의 모습과 오베데돔 집에서의
3개월 체류(사무 하 6,5-15)가
유다 산골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와 비교되고 있다. 마리아를 맞이하여
뱃속에서 기뻐 뛰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과 마리아의 3개월 체류가 유사하다고 본다(루카
1,39-56).
d. 아가서의 신부(新婦)(아가서
2,2; 4,7-8)
마리아여,
당신은 온전히 아름다우시고 원죄에 물듦이 없나이다(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성무일도 제2저녁기도 제1후렴.
참조: 아가서 2,2“아가씨들
사이에 있는 나의 애인은 엉겅퀴 사이에 핀 나리꽃 같구나.”).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
나와함께 레바논에서, 나의 신부여,.......(아가
4,7-8)
아가서의 백합처럼 정결한 신부에 관한 시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대축일(12월
8일) 성무일도 제2저녁기도
첫 후렴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는 마리아를 흠잡을 데 하나 없는 하느님의 정결한
신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e. 닫혀 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그대는 닫혀 진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닫혀 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교회 전승은 이 성경 구절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존재라는 의미의 동정성을 읽어내고 있다.
특히 교부 베드로 크리솔로고(Petrus Chrysologus)는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육화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내려오는 순간 이루어진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
f. 지혜(잠언 8,22-36)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지혜)를
지으셨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잠언
8,22-36)
여기서는 ‘지혜’를 인격화 하여 소개하고 있다.
사실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 잠언서의 ‘지혜’를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도 그 ‘지혜’를 수용하고 잉태케 한 여성의 응답을 통해서 사람이 되신다.
마리아는 자신을 겸허하게 여종으로 자처하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순종의 자세로 응답하였다. 또
‘지혜’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모두 여성명사다. 여성명사로 표현한
것은 그저 우연하고 무의미한 문법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마리아의
‘지혜’와 연관성을 고려할 수 있다.
2) 마리아의 예형적 인물들
a. 하와
하와라는 이름은 ‘지아비에게서 나온’ 또는 ‘인류의 어머니’ ‘생명’이라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를 ‘새 하와’ 또는 ‘제2의 하와’로
부르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새 아담’으로 부른 것을 교부들이 본뜬 것이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도 마리아를 ‘새 하와’로 표현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도 그렇게 부른다(LG 8장 56항).
b. 사라
이사악의 잉태에 대하여 하느님은 사라에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창세
18,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말한다. 특히 사라가 하느님으로부터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을 얻게 된 사실이 서로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c. 아브람
사라보다도 아브람은 마리아와 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아브람이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듯이 성모 마리아는 ‘신앙의 어머니’로 불린다.
구약의 신앙인 아브람과 신약의 신앙인 마리아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 창세 18,1과
루카 1,26-27.
- 축복의 원천: 창세 12,3;
18,18;22,18과 루카 1,42.48.
- 신앙을 통한 기적적인 아들 출생: 창세
15,6과 루카 1,45.
- 아브람의 이사악 봉헌과 성모 마리아의 예수님 봉헌(성전과
갈바리아 산상): 창세 22장과 루카
2,22; 요한 19,25-27.
d. 한나
하느님이 허락하신 모성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서,
「한나의 노래」(사무 상 2장)와「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가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e. 유딧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잘라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여장부로서 백성들로부터 받은 찬양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으로부터 받은
찬양과 흡사하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서
1,318).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f. 에스테르 황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중재인으로서 에스델과 하느님 백성의 중재자로서의 마리아가 비슷하다.
이 외에도 ‘노아의 방주’,
‘에덴동산’, ‘솔로몬 궁전’과 같이 마리아를
상징하는 수많은 성서의 예형들이 있다.
6. 구약성경의 결론
구약성경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한 민족의 역사적․신학적
기록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예언자들이 앞에서 이 희망의 역사를 이끌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계시를 시대의 사상과 언어와
현실을 바탕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런 예언으로 인해 악이 만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인류의 역사가 마침내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구는 종말론적 희망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이 모든 희망과 예언은 메시아라는 인물에 집중되고 있다.
그 메시아가 누구인지 서서히 밝혀지는 것이다. 여인
하와의 후손, 다윗의 후손, 우리 인간과
하나도 다름없이 한 여인으로부터 태어날 아기요, 임마누엘이라 불리게 될 아기이다.
여기에 그 메시아와 더불어 메시아의 징표를 알려줄 어머니로서의 여인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그 여인은 소박하고 순진한 ‘알마’요, 하느님께
성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anawim)로서의 ‘시온의 딸’이다.
출산하는 그 여인은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메시아적
기쁨에 초대된 여인이다. 구약 안에서 그 여인은 메시아만큼이나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인 만큼, 그
여인은 마리아라고 할 수 있다.
II. 신약성경
예수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들의 지도 아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바오로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티아서
4,4-5)라는 마리아에 관한 암시적인 언급과 더불어 루카가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여기서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명시되고 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 당시 복음 선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전하는 사도행전은 함께 기도하였던 이
공동체가 성령을 받고(사도 2,1.13)
매일 성전에 가서 기도하였다(사도 2,46)고
전한다. 또한 사도들과 함께 빵을 나누면서(성체성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며,
재산을 함께 나누고 주님이 다시 영광중에 오시리라는 종말의 기대를 함께 하였다(사도
2,42-47; 4,32-35; 5,12-16)고 전한다.
그 공동체에 성모 마리아가 함께 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 때부터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불렸으며,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성모 마리아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때부터 가장 핵심 인물이요,
핵심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육화와 깊이 연관을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와 복음사가들의 진술은 이런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한다.
1. 사도 바오로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선교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핵심으로 삼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그의 글 속에서 마리아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 중에서 암시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갈라티아서
4,4-5이며 간접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연관시켜 볼 수 있는 부분은 로마
1,3-4; 필리피 2,6-11; 갈라
1,19; 4,28-29 등이다.
1) 갈라 4,4-5: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첫 번째 증언(53-57년경)으로
본다. ‘여인에게서의 탄생’은 구약성경이나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듯이 인간적 조건을 드러낸다. 갈라 4,4에서
구원역사의 중심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이 ‘여인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울러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비록 밝혀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여인’이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들의 육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아들로 하여금 참된 인성을 지니게 하고,
또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 ‘여인’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해 있는
결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2) 로마 1,3-4: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이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간접적인 언급으로 볼 수 있다.
‘육으로는’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지니게 되는 데 있어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드러낸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에게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였다.
3) 필리피 2,6-11: 선재(先在)하시는
하느님의 육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 2,6-11)
「그리스도 찬가」라고 일컫는 이 자료는 바오로 이전부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전례 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바오로가 자신의 편지에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미 계셨던(先在)
분임을 밝힐 뿐 마리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구절을 마리아가 자신을 일컬어 “당신 종”(루카
1,48)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노래」와 연관해서 묵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인성은 마리아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4) 갈라 1,19: 주님의 형제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갈라
1,19)
‘주님의 형제’(adelphos)는
마리아 동정에 관한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었으나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하나,
즉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구별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 12장17절과
15장13절에 나타나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 회의가 있기 이전에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하였다(사도
12,2).
5) 갈라 4,28-29: 육에 따라 태어난 아들과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에 따라 태어난 아들이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을 박해한 것처럼,
지금도 그렇습니다.(갈라
4,28-29).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 또는 ‘성령으로 태어난 이사악’이란 바오로의 표현은 과연 동정 탄생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구절은 문맥상 이스마엘과 이사악을 대조하고,
아울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대조하고 있다.
6) 마리아에 관한 바오로 진술 종합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가 한 복음 선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인’이라는 표현으로 단 한 번 언급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위해서, 즉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육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분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이 참 사람이 되신 점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친인 이 ‘여인’은 육화의 신비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2. 마르코 복음
마태오,
루카, 요한복음들에 비하면 마르코 복음은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가장 적다. 그 이유는 마르코가 파스카 사건과 예수님의 인격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가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비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아서 그의 복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나아가 마리아까지도)은 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장만을 읽고 가볍게
해석하면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리아가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르코 복음 속에서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서는
3가지 부분(3, 20-21; 3, 31-35; 6, 1-6)을
들어볼 수 있다. 이제 그것을 차례대로 간략하게 보도록 하자.
1) 마르 3,20-21: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러 간 친척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있게 하려고 방금 뽑으신”(마르
3,13-19 참조) 열두 사도와 함께 어떤 집(아마도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다)에 갔었는데,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의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간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마리아의 이름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서 “붙잡으러”라고 번역된 단어
크라테오(Krateo)는 강압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식사할 겨를조차 없는 예수님에 대한 가족들의 애정이 담긴 단어라는 것이다.
많은 성서 주석가들이 이
20-21절을 31-35절과의 관련 하에 본다.
즉 21절에 언급된 “예수님의 친척들”은
31절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2) 마르 3,31-35: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
선언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2-35)
여기서는 마리아가 뚜렷하게 ‘예수님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또한 21절의 분위기와는 달리 마리아와 그의 가족들이
그를 붙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방문한 것으로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 방문 사실을 이용하여 ‘하느님 나라’와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선언하신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새로운 ‘종말론적 가족 관계’의
형성으로서, 혈연적 관계보다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함으로써 가족이 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개신교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거부한 대목이라고 주장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의도적으로 그 어머니와 형제들을 악평하려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신 선언은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에 대한 찬양이 아니었지만,
마르코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마리아를 제외시키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면, 성모 마리아보다 더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다.
한편 이 ‘종말론적 가족’의 선언에는 ‘아버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마르코가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마르코의 깊은 의도가 담겨있는데, 새로운
종말론적 관계 안에서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뿐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어머니”로 소개된 마리아는 중요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코가 표현한 종말론적 관계 안에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따른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3) 마르 6,1-6: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이 부분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마태 13,
55) 혹은 “요셉의 아들”(루카 4,
22; 요한 6, 42)이라고 표현하는 다른
복음사가들과 달리, 마르코는 예수님을 “목수”로 직접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다만 마리아의 아들로만 나타난다.
요셉은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니며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아직 확정 지어 단언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이곳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관련하여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또 다른 자식들을
낳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즉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형제”(adelphos)라는
단어는 사촌이나 조카들까지도 가리키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의 아들(마르 15, 40. 47)로도
등장한다. 또한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의
자녀들’이라고 표현한 곳은 없으므로 함부로 이런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4) 마르코 복음 속의 마리아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들의 운명을 염려하는 여인이다.
예수님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에(마르
3, 6) 더욱 신중한 경계를 하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 급히 달려갔을 것이다.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나 ‘요셉의 아들’로 불리는 대신 ‘마리아의 아들’로 표현된 것을 볼 때,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어머니이심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아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여전히 동정으로서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전형이
되시는 것이다.
3. 마태오 복음
마태오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 비해서 성모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훨씬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고 있던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글 안에 이스라엘의 전통과 관습을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런 면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과거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시절 이야기(마태
1-2장)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와 미래를 자신의 복음
안에 서술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 마리아에 관한 언급이 있는 곳은 예수님의 과거(어린
시절)에 해당되는 1장과 2장이며,
예수님이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는 현재 부분을 묘사하는 12장이다.
1)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성모 마리아
a. 마태 1,1-16: 예수님의 족보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루가 복음의
1-2장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마르코 복음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두 복음 사이의 다른 점은 마태오 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족보의 목적은 세 가지인데,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분은 합법적인
메시아라는 점, 셋째, 바로
그분이 구원 역사의 정점이요 종합이시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14대씩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1, 17 참조)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1,
1-6), 다윗부터 여호야킨까지 14대(1,
6-11), 그리고 여호야킨부터 그리스도 예수까지 14대(1,
12-16)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해볼
것은 일반적인 기술 방법을 깨뜨리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기술 방법에서 벗어난 첫 번째 요소는 “누구(아브라함)는
누구(이사악)를 낳았고”식으로 서술된
족보 중 네 군데에서 “누구(살몬)는
누구(라합)에게서 누구(보아즈)를
낳았고”라는 식으로 바뀌고 거기에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세기
유다이즘에서 족보에 여인들의 명단을 열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요소는 예수님이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마태
1, 16)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예외적인
사례를 통해서 마리아를 살펴볼 것이다.
먼저 이 족보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을 보자. 타마르(3절)와
라합(5절 a), 그리고 룻(5절
b)과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6절 b)가
그들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 사회를 염두에 둘 때,
여인들의 이름이 족보에 등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굳이 마태오가 이 여인들의 이름을 넣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공통점으로서는 현재까지 4가지
주장이 있다. 첫 번째는
예로니모 성인의 설명에 따라 그 여인들이 죄인들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등장시켰다는 주장이다. 사실 타마르는 창녀처럼 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다(창세 38장).
원래 이방인 창녀 출신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와준 덕분에 이스라엘로 귀화하였고(여호
2,1 이하),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의 먼
친척 보아즈를 유혹하여 오벳을 낳았으며(룻기 2-4장)
바쎄바는 다윗의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로서 다윗과 정을 통한 여인(2
사무 11장)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들의 행동을 죄로 소개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마르의 행동을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창세
38,26)라는 말로써 정당화하거나 룻과 라합을 영웅적인 여성으로 묘사(룻기
1장; 여호 2장과
6장)한다.
또한 바쎄바의 경우에는 죄의 책임이 그녀에게보다는 다윗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죄인으로 표현된 적이 없는 마리아와
이 4명의 여인들과의 공통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주장은 그들이 이방인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 중 바쎄바가 이방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유다 여인이었던 마리아와 이방인은 공통점이 없다. 세 번째
공통점으로 주장되는 것은 이 여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쌓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무리는 있다. 업적 면에서 보면
그들보다는 오히려 사라, 리브가, 라헬,
레아 등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네 번째 주장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리아 역시 요셉과의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이들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주장은 하느님이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는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
계획의 도구로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또 다른 두 번째 요소를 보도록 하자.
복음사가는 2절부터 15절까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라는
식의 문체를 유지한다. 그런데 16절에
와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며
갑자기 문체를 바꾼다. 그 까닭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부친인 요셉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인해 태어나신
것이다. 복음사가가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예수님의
부친’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의 이 부분에서 마리아가 혈통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도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다.
b. 마태 1,18-25: 예수님의 탄생
…그분(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태
1,18-25)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 동정으로 잉태되고 탄생된 사실을 명확하게 밝힌다.
족보에서는 약간만 암시되던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가 바로 여기서 확실해지는 것이다.
요셉은 예수의 탄생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은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다음 고민하며 파혼하기로 작정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요셉이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은, 유대인들의 결혼
관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결혼 관습에서는 약혼자가 자신과
상관없이 아이를 임신하였을 경우 당연히 간음으로 간주하며, 이 경우 파혼하든가
아니면 친정에서 1년 간 지내게 하는 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은 요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기하고 마치 결혼한 아내처럼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이러한 결혼은
분명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평범하고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었다. 위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들의 결혼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데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마리아-요셉의
결혼은 그들의 결혼과도 또 다른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이사
7, 14),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마리아 역시
일찍부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던 분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바로 예전에
‘알마’(álmah)로
표현되었던 ‘동정녀’이다. 그런데,
마리아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루카복음(루가 2, 1-7)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요셉의 역할이 무시되지 않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전통을 의식하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 아기의 이름은 요셉에 의해 예수로 명명되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보증 받고 있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유다 사회 안에서 이와 같이 요셉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에서 언급된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c. 마태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그러자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
집에 들어 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2)
루가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동방 박사들이 아기와 마리아에게만 “엎드려 경배하였다”는 것은 이색적이다.
아마도 이것은 마리아가 다른 어떤 여인들보다도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여기에서는 “너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네게서 영도자가 나와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양 치듯 돌보리라”는 미카서의 예언(미카
5, 1. 3; 사무엘 하 5, 2와 역대기 상
11, 2 참조)이 인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이 분명 메시아의 탄생이요, 예언의
성취라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아기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 곁에 어머니 마리아가 있다는 점도 좋은 묵상 자료가 될 수 있다.
성모 마리아를 지나치게 내세움으로 인해 아기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와 반대로 성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 이 부분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d. 마태 2,13-23: 이집트 피신 사건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마태
2,13-23)
요셉의 역할이 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요셉은 어려운 상황에서 늘 하느님의 계시를 꿈을 통해서 받고 그분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 아기 예수를 헤로데의
손으로부터 피신시키는 일, 귀향시키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루카복음에서 마리아가 주역을 담당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이유는 마태오가 당시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제도와 관습의 유대인들을 중점 독자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공생활과 성모 마리아
a. 마태 12,46-50: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태오 복음에는 마르코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련된 마리아에 관한 첫 번째 자료(마르
3, 20-21), 즉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친척들이 “붙들러” 갔다는 부분은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분의 가족들이 대비되어 있는 것은 마르코 복음과 유사하다.
예수님과 혈연적 가족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 관계로서 말씀의
중점에 놓인 것이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공생활에는 마르코를 통해서
본 것 이상의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리아는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점을 들자면,
마르코는 예수님 주변에 모인 군중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반면,
마태오는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교회론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르코에서
발견되는 “예수가 미쳤다”고 하는 소문이나 그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러 가는 일은 소개되지 않는데,
만일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하고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는 등 신기한 일을 겪은 마리아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만을 믿고 그를 붙잡으러 간다면 그것이 비논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가족 관계에
관한 내용은 마르코와 일치하고 있다.
b. 마태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이 부분도 마르코의 보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마르코가 예수님을 직접 ‘목수’라고 밝히는 것과 달리 마태오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마르코가 “예수님 아무런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 하실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하는 점이 다르다. 마르코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려고 했던 반면,
마태오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려던 입장에 있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부류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마르코와는 다른 점이다. 마르코가 ‘그의
친척들’을 ‘예언자들을 환영하지 않는 부류’에 넣고 있는데 마태오는 그런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성령을 통해서 그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류에 속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기는 하지만 아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그 뒤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3) 마태오 복음 속의 마리아 결론
마태오 복음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려는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띠고 있다.
이 복음의 대상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다(마태
28,19). 구약의 전승에 의하면, 메시아의 조건은
베들레헴에서 출생(미가 5, 1-5)한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참조: 나단의
예언). 또 그 메시아는 평화의 왕,
정의의 왕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이어야
했다(이사야서, 특히 7장
14절과 9장).
마태오는 이러한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 요셉은 예수님이 적법한 다윗
가문의 메시아임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님의 고향이
나자렛인데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그분이 이미 예언된 메시아임을 확인해 주며,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그분의 메시아로서의 왕권을 확인하게 해준다.
게다가 마리아의 동정 잉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30)라고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론을 위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기능을 통하여 마태오 복음은 이사야
7장 14절에서 불투명했던 ‘알마’(álmah)의
의미가 ‘동정녀’요 또한 하느님의 계획 속에 예전부터 선택된 분이라는 사실을 아울러 밝혀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과정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적 생활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뒷전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하는 그분의 겸손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4.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루카 복음사가는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서 순서대로 정리하려 노력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원이었다.
세상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소개하고자 했던 그는 여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기쁨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루카가 전하는 내용 속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고 풍부한 성모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로부터 루카는 화가(무엇보다도
성모 마리아를 가장 먼저 그린 화가)였으며,
의사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것은 루카가 다른
어떤 복음사가보다도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는 과정을 마치 의사처럼 상세하게 진술하며,
성모 마리아의 인격적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는 사도행전의 작가이기도 하므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전체 내용을 통해 다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마리아
2) 예수님의 공생활과 마리아
3)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의 마리아
1)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마리아
a.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마리아에 관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뻐하여라.”로 시작되는 천사의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메시아적 기쁨으로 초대하는 인사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이”라는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이 말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판관 기드온에게서 보듯이 이 말은
중요한 사명을 맡길 때 사용된다(판관 6,12-24).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일반적으로 즈카르야에게 발현한 천사가 전하는 요한 탄생의 예고(1,5-25)와
비교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즈카르야-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서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마리아가 요한과 엘리사벳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쪽에 있는 도식 참조).
루카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예수님 탄생 예고를 역사 구원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시대가 시작되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한의 탄생으로 구약의 준비기간이 완료되고 예수님의 탄생으로 종말론적 완성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협력한 여인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라고
대답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높으신 아드님이 태어나는 장소로서 협조자로
불림을 받은 여인이다.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응답하는 피조물 인간의 모범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백성의 대표로서 “예”라고 대답한 것이다.
|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루카 1,5-25)
|
예수님 탄생 예고
(루카 1,26-38) |
|
- 예루살렘
- 즈카르야-엘리사벳
- 13절: ‘네 간구를’(낮은
곳에서)
- 즈카르야의 의심 |
- 갈릴레아-나자렛
- 하느님의 은총
- 30절: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위)
- 마리아: ‘Fiat’ |
|
세례자 요한의 출생
(루카 1, 57-80)
|
예수의 탄생
(루카 2, 1-21) |
|
- 여드레 만에 할례
- 아기 이름: 즈카르야
(요한)
- 즈카르야의 노래 |
- 여드레 만에 할례
- 천사가 일러준 대로 ‘예수’
- 천사가 하느님 찬양, ‘하늘 높은
곳...’ |
b. 루카 1,39-45: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루카는 예수님이 계시는 마리아의 태중을 구약에서 하느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의 궤’와 비교하고 있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는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성령을 가득히 받고 환호하게 하고,
그녀 태중의 아들이 기뻐 뛰놀게 하였다. 이러한
기쁨과 환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이며, 종말론적 기쁨을 표현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고 있다.
마리아가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본 것이다. 이처럼 주인공이 된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양 고백은 다음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①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1,42):
이런 찬양은 야엘과 유딧에게서도 발견된다(판관
5,24; 유딧 13,18).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높은 차원의 종말론적 의미를 띠고 있다. 마리아를 찬양하고
난 다음에, 그 태중의 아기에 대해서도 찬양을 한다.
태중의 예수님은 바로 마리아가 축복을 받게 되는 원천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모든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 여인이 된다.
② “주님의 어머니”(1,43):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메시아의 어머니,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로 고백된다.
마리아께 대한 축복은 그분의 믿음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들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③“믿으셔서 행복하신 분”(1,45):
천사의 메시지에 대한 마리아의 신앙적 응답을 떠올리게 해주는 대목이다.
마리아는 단지 혈연적으로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 때문에’도 그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리아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과 특권은 바로 이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c.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46-56)
이 노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자료인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마리아 자신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 찬양(1,46-50), ② 인간 역사 안에 행하신 하느님의
업적 찬양(1,51-56)
① 마리아 자신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 찬양(1,46-50)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행하신 하느님의 두 가지 업적을 통해 느낀 기쁨을 표현한다. 한
가지는 ‘비천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비천한 자들은 ‘야훼의
가난한 자들’(anawim)의 처지로도 볼 수 있겠다.
또 한 가지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위대한 일을 이룩하셨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보잘것없는 자신에게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하느님 아들의 탄생,
즉 육화를 이룩하신 일도 위대한 하느님의 업적임들 고백하고 있다.
이런 두 가지 동기로 인해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 자신을 찬양한 일은 세세 대대로 계속해서 자신에게 적용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상황의 반전이 곧 구원의 법칙임을 체험하고 있다.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이 끌어내려지고 ‘비천한 이들’이 들어 높여지며,
‘굶주린 이들’이 배부르게 되고 ‘부유한 자들’이 빈손으로 내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상황의 반전은 신앙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교만한 자들’(1,51)은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속하는 사람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부유한 위치에서 능력을 지닌 자들이며 정치적․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루카는 이러한 하느님 자비의 체험이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 백성에게 이를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주님의 종’이라는 성모 마리아의 표현은 이스라엘의 ‘야훼의 종’(1,54;
이사 41,8)과 연결되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이사야의 ‘야훼의 종’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이사
53,12-) 주님의 종 마리아에게서 야훼의 종 메시아가 탄생한다.
하느님은 이 ‘야훼의 종’을 통해서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 후손들에게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것이다.
d. 루카 2,1-7: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 탄생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1-7)
루카
2장에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점에 있어서는 1장과 매우 다르다.
4절에서는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마리아와 요셉의 약혼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므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예수님은 합법적으로 다윗의 후손이 되고 있다.
다윗 가문의 고을 베들레헴도 메시아 탄생의 표징이 되고 있다(미카
5,1-2). 여기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아기 예수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인 것이다.
목자들은 그것을 보고 아기가 주님이요 그리스도임을 알아본다(루카
2,8-12 참조). 마리아는 이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있다. “해산날이 되어”라는 표현은 다른
아기들의 탄생과 다르지 않게 자연스러운 생리과정을 거쳐 예수님을 출산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첫아들”이란 표현은 훗날 둘째나 셋째 아들을 전제한 것이라는 논쟁을 일으키지만,
이 표현은 예수님 봉헌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아들들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첫아들을
바쳐야 하는”이스라엘의 율법과 관련이 있다.
e. 루카 2,8-20: 목자들의 아기 예수님 경배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8-20)
천사가 목자들에게 제시한 표징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이다.
아주 소박한 표징이지만, 소박한 사람들은 소박한 것
안에서도 징표를 읽어낼 줄 안다. 루카는 이 소박한 표징 안에,
바로 엄청난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세주가 보잘것없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계와 약함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고운 베에
싸여 무덤에 묻힌 예수님(23,53)과 잘 연결되고 있다.
루카는 예수님의 시작과 마지막, 요람과 무덤,
생명과 죽음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즉 메시아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 인간과 똑같은 운명에 참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아기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배려와 보호가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는
구절은 뜻밖의 탄생 예고를 천사에게서 듣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모습(1,29)과
알아들을 길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품성(2,51:
성전에서 예수님 찾은 후 보인 마리아의 태도)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화내지 않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며 가슴 깊이 담아두는 훌륭한 인격자이다.
f. 루카 2,21-24: 할례와 작명,
정결례, 아기 예수님 봉헌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1-24)
마리아는 신생아와 관련된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그대로 세 가지 예식을 치르고 있다.
첫째는 할례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치러야 한다(레위 12,3).
마리아는 그 율법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천사 가브리엘이 일러준 대로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둘째,
첫아들 봉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맏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탈출 3,1-2; 11-12; 14-16;
민수 8,16-17). 루카는 마리아가 이 규정도
지키고 있음을 전한다. 셋째, 아이를
낳은 산모가 지켜야 하는 정결 예식(레위 5,7; 12장)이다.
구약성서 규정인 정결 예식에 의하면(판관
12,1-8),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을 경우 40일
간, 여아를 낳을 경우 80일 간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것을 씻기 위해 어린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시 가난하다면 두 마리의 비둘기를 사제에게 바쳐야 했다.
법대로 살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카는 이 구절에서 마리아가 “율법에 따라” 행했다는 사실을
3번이나 반복하고, 천사의 명령대로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라는 제물이 보여주듯이, 마리아가
노래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가난한 삶을 살았음을 알려준다.
g. 루카 2,25-38: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25-38)
시메온의 예언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두 번째 예고(첫
번째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이다.
시메온은 성령을 받아서 이미 엘리사벳이 했던 것처럼 찬양의 노래를 바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되는 구원이 올 것임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신다는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선언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범위를
넘어선다. 시메온은 아기의 부모에게 찬양과 축복을 드린 다음,
예언 형식으로 또 하나의 신탁을 전하고 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것으로서,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요,
걸림돌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비극적 운명은 ‘반대를
받는 표징’이나 마리아의 영혼을 꿰뚫는 ‘칼’ 등의 표현에도 담겨 있다. 이런
표현들은 메시아의 고통과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마리아가
예수님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깊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h. 루카 2,39-40: 나자렛 고향으로의 귀향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9-40)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그 출신지 나자렛은 걸림돌이었다.
제자 나타나엘이 필립보가 나자렛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할 때 즉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2,46)라며 반박하는 모습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인데도 하느님의 총애를 받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하느님의아들,
메시아임을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요셉과 마리아가
주님의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음을 다시 반복하여 말한다.
i. 루카 2,41-52: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41-52)
이 구절은 예수님의 소년기를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소개된다. 또 파스카적인 용어를 통해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를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이야기와 부활 사건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2,41;
22,8. 13), “사흘”(2,46; 24,46),
“아버지”(2,49; 24,7),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였다”(2,50;
24,25)는 등의 표현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이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잘 그려낸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 감추어진 파스카의 신비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비가 모든
신앙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결코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 있고 내맡겨져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신앙의 자세는 목자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2) 예수님의 공생활과 마리아
a. 루카 8,19-21: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루카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진술과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속에서는 한 번도 ‘마리아’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만 사용하고 있다.
마르코나 마태오도 전하고 있는 이 장면은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머니와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19절).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냐?”(마르
3,33; 마태 12,49)는 질문도 생략되고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새로운 가족으로서 ‘군중’을 바라보거나(마르
3,34), ‘제자’들을 가리키는(마태
12,49) 몸짓도 없다. 결코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종말론적 가족과 대조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8,11-15)에
이어서 배열함으로써 예수님과 그의 가족을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사람들’로 연결시키고 있다.
루카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분이다.
그것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라는
순종적 신앙 고백과 조화를 이룬다.
b. 루카 11,27-28: 참 행복과 성모 마리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이 내용은 루카복음에서만 소개된다.
그리고 이 내용 뒤에 믿음이 없는 세대를 질책하는 이야기가 따른다(11,29-32).
두 가지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혈연적 관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거부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오히려”라는 접속사는 ‘물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마리아의 행복은 겹치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낳아 젖을 먹여서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기에 더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표현 방식을 보면,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는 여인’은 행복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1,42)라는
엘리사벳의 축복은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마리아의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인 것이다.
3) 사도 1,12-14: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의
마리아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ㅘ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2-14)
사도행전은 그의 서문(사도
1,1-5)에서 루카복음에 이어 두 번째로 쓰인 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사도행전의 저자는 루카 복음서와 동일한 저자로 알려져 있다.
루카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마리아의 행적에 대해 전해주는 유일한 저자이다.
마리아는 12제자나 72명의
제자들처럼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요한 복음사가도 십자가
곁에 계신 모습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듯이, 사랑 받는 제자가
그의 집안에 마리아를 모셔 들였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루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교회 탄생의 순간까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데 동참했다는 것을 전한다.
4) 루카 복음 안에서의 마리아 결론
루카복음사가는 인간의 역사를 하느님 구원 역사로 인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고자 하였다.
다른 복음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성모마리아의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의식하였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단순한 추억거리로 소개된 것이 아니다. 또 예수님은 부활로 인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다. 이단자들의 주장처럼 세례를 받으면서 그 순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된 것도 아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언자들이 말했던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것이다.
마리아의 동정에 관한 진술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참 아들이심을 증언해 주는 한 예가 된다.
그러므로 루카는 마리아를 ‘하느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확실하게 전해 줄 사람’으로
소개하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루카
2,19.51)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루카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분’에 그치지 않는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에 계시면서 그분을 사랑하며 믿고 따랐던 분이시다.
단순히 그분을 낳고 기른 어머니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기에 참으로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고(루카 1,38),
어머니가 되신(루카 8,21;
11,27-28; 사도 1,14) 분이시다.
그분이 찬양 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믿음이다(루카
1,45). 그리고 찬양 받아야 하는 또 다른 근거인 태중의 아드님은 그 믿음의 결실(루카
1,42)이다.
루카는 마리아가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것이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복음사가이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자신이 받은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주었으며,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분은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이시며
“은총이 가득한”(루카 1,28) 분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루카복음의 진술을 통해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요한복음과 요한 묵시록
약
90년경에서 100년경 사이에 쓰인 요한복음의 저자는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았던 제자, 제배대오의 아들 요한이라고(요한
21,20.24) 알려져 있다. 요한복음사가의 신학은
‘현양의 그리스도론’인데, 여기에는 주님이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선재하셨던 분(요한 1,1-3)이라는
사상이 전제되고 있다. 영광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계시는 많은 표징(기적)들과
‘나는~이다’(Ego~eimi)라는
특별한 도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죽음․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시간’ 즉 그분의 삶에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현양’(顯揚), 말하자면 하느님
아버지 곁 영광스러운 자리로 되돌아가는 순간으로 이해된다. ‘예수님의 시간’은
13장의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는 순간에 강조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시간’에 관련해서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다.
마리아와 관련되어 뚜렷하게 나타나는 대목은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와 ‘십자가 사건’(요한
19,25-27)이다. 그러나 서론에 있는
‘로고스의 육화’(요한 1,13)에도
예수님의 동정 탄생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요한복음의 세 가지 진술을 통해서 마리아를 살펴볼 수 있다.
요한 묵시록의 경우,
요한의 이름으로 쓰이긴 하지만, 그가 요한 복음사가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묵시록을 뜻하는 희랍어 ‘apokalypsis’는
‘장막이 벗겨짐’, ‘계시’를 뜻한다.
묵시록은 예언자들의 예언과는 달리 새로운 형태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예언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활동을 기대․희망한다면
묵시문학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해 옛 시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많은 상징과 암호가 사용되고 있다.
묵시록 12장의 ‘여인’은
마리아와 관련되어 있다.
1) 요한 1,13-14: 로고스의 육화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3-14)
요한복음의 서론에 속하는 이 구절은 말씀(로고스)에
대한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13절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관련된 언급으로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관한
간접적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육의 탄생에 관해 세 가지를 거부하고
있다. ① 피, 즉 혈육으로부터의 탄생,
② 육욕으로부터의 탄생, ③ 인간적 욕망으로부터의
탄생이다. 이러한 거부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질적→동물적→인간적 차원으로 단계적 상승을 보인다.
2)요한 2,1-12: 카나의 혼인잔치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 날 머무르지는 않으셨다.(요한
2,1-12)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과 그 모친 사이의 대화(2,3-5)이다.
“포도주가 없다”는 마리아의 제보는 예수님에게 어떤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었을까?
이제까지 예수님은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않았는데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이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으며, 그 결과 첫 번째 기적이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내용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자료’라는 데는 모두 일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을 행함으로써 당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영광을 드러내셨으며,
제자들의 신앙을 고취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사가의
근본적인 의도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징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계약’이 ‘옛 계약’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단어들(시작,
때, 여인,
영광, 믿음, 제자들…)이
많이 열거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마리아도 포함되어 있다. 마리아는 부수적인 인물이
아니라 중재자로서 주역을 맡은 인물로 등장한다. 마리아의 참석에 대해 예수님과 그
제자들보다도 앞서 소개(2,1)가 되는 것도 그 예이다.
기적이 l일어나는 데 있어서의 주도권도 마리아에게
있다(2,3).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리아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2,5).
카파르나움을 향해 가는 일행 중에서도 마리아는 형제들이나 제자들보다도 앞서 등장한다(2,12).
이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발현하신 사건과
비교하는 도식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a. 시나이 산 계약의 형식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시나이 산에서 맺어진 계약과 비교된다.
시나이에서는 모세가 야훼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일꾼들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
시나이 산에서는 ‘율법’의 선물을 얻게 되지만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메시아의 ‘포도주’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시자이 산에서 백성들이 했던 응답은 마리아가 일꾼들에게 했던
당부의 말과 동일하다.
|
시나이 산 |
카나의 혼인잔치 |
|
탈출
19,8 |
탈출
24,37 |
요한
2,5 |
|
무엇이든지 |
무엇이든지 |
무엇이든지 |
|
야훼께서 |
야훼께서 |
그가 |
|
말씀하신 대로 |
말씀하신 대로 |
시키는 대로 |
|
우리는 하겠습니다. |
우리는 하겠습니다. |
하여라 |
이런 도식을 보면,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심이 암시된다. 이런 계약의
도식은 카나를 새로운 시나이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자리에,
마리아를 모세의 위치에, 그리고 일꾼들과 제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자리에 놓고 있다. 마리아는 기적의 협력자일 뿐 아니라 세상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고백해야 할 신앙을 앞서 고백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것이다.
이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마리아와 혈연적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분리 이론’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마리아가 적극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카파르나움으로 돌아가는 일행 중에 함께 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주장을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바로 그 ‘여인’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 상황에서 마리아는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순종하도록 권고하는 적극적인 중재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카나의
기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께 중재 기도를 청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b. 파스카적 전망
이 구절은 파스카 사건과도 비교된다.
파스카 사건에 ‘사흘’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사흘’(2,1)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있어서도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이 관계되어 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없구나.”라는
말로써 기적의 실마리를 여는데, 이것은 마르타가 자기 오빠 나자로가 죽었을 때
소생시켜 주기를 간청(요한 11,22)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때’를 이야기한다.
이 ‘때’는 요한복음 전체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수난과 영광의 때’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때’가 &